배는 한국의 김 아무개가 샀는데, 배의 국적이 영국이라 영국 국기를 달고 다녀야 한다면...
그렇다. 배는 소유주(선주)와 국적이 다를 수 있다. 여기에서 영국은 기국(旗國, flag state)이 된다. 반면에 소유주는 개인이나 회사 등 선박을 실제로 소유한 사람으로서, 선박은 선주와 국적이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선박은 소유주가 자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 선박을 등록하여 해당 국가의 국적을 사용할 수 있다.
조선소 계약설계(기본설계 기본반)에 근무하면서 처음에는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약 문의는 분명히 덴마크 국적의 선사가 하고 있는데, 배의 국적은 라이베리아(Repblic of Liberia)로 하고 싶다고 하니... 당시 나는 라이베리아가 어느 대륙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었다(서아프리카에 있으며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가다). 또한 배를 검사하는 선급(Classfication Society)은 처음에는 영국 선급(Lloyd's Register)을 선호했으나 최종 단계에서 미국 선급(ABS)으로 정했는데, 나름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왜 선주는 선박을 다른 나라에 등록할까?
선박을 등록한 다른 국가를 '편의치적국(Flag of Convenience)'이라고 부른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편리하려고 다른 나라에 등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이럴 경우 편의치적 선박은 편의치적국의 법률과 규제를 따른다. 편의치적의 장점은 낮은 세금과 등록비, 간소화된 등록절차와 함께 소유주 국가의 노동법 및 임금 등 관련 규제를 적용할 필요가 없어 고용의 유연성과 함께 운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등 선주는 해운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구입했다고 생각해보자.
그 차를 한국에 등록하지 않고, 세금이 싸다는 이유로 라이베리아에 차를 등록하고 그 나라에 세금을 낸다면... 아마 난리가 나지 않을까? 그러나 선박의 경우 국제법(예: UN 해양법)상 공해(公海, high seas)를 운항하는 선박은 반드시 국적을 가져야 하지만, 어떤 나라에 국적을 부여할지는 각 나라의 재량에 따르고 있다. 또한 국내법(예: 선박법)에서도 외국인이 소유한 선박을 등록할 수 있는 조항을 두고 있다.
이러한 편의치적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미국 선주들이 자국의 금주법(주류 판매 금지)과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 파나마에 선박을 등록한 것이 대표적 사례로 이후 이러한 관행은 경제적 동기가 더해지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편의치적은 해운업계에서는 비용 절감과 운영 효율성을 위해 선택한는 전략이지만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편의치적 국가들의 안전 및 환경 기준이 낮아 사고나 환경오염의 위험이 증가할 수 있으며, 저임금, 열악한 근무 환경 등 선원의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밀수 등 범죄활동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고, 선주와 기국의 연결고리가 약해서 규제 집행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이에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IMO)와 같은 기관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강력한 감독과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법인격 부인론'과 같은 원칙에 따라 유류오염과 같은 사고가 났을 경우, 편의치적된 선사가 모든 책임을 부담하고 실제적인 선주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선박 소유자는 편의치적으로서 이익을 누리면서도 손해배상 등 책임 문제에세 법인격 부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선박을 소유하고 운영해야 한다(출처: 한국해운신문, 2013.12.13.).
아래 표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전세계 선박 등록국가 순위를 보여주고 있다.
총톤수(GT, Gross Tonnage) 100톤 이상 선박을 대상으로 재화중량톤수(DWT, Dead Weight Tonnage) 기준의 2014년과 2024년 등록국가(기국) 순위를 나타내고 있다. 놀랍게도 해운강국인 그리스, 노르웨이, 한국 등은 순위에 없다. 대신 파나마, 라이베리아, 마샬 아일랜드에 등록된 선박이 무려 40%가 넘으며, 점유율은 10년 동안 상승했다. 또한 외국선주 비율이 거의 100%로 이들 국가가 소유하는 선박은 거의 없다. 참고로 2022년에 라이베리아가 파나마를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선 바 있다.
DWT에 대해서는 다른 블로그 글 <(알쏠바잡-5) 배에 얼마나 많은 물건을 실을 수 있을까?>를 참고하기 바란다.
사실 위의 정보만 알기에는 뭔가 꺼림칙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실제 선박을 보유한 국가별 순위를 함께 찾아 아래 표와 같이 나타내 보았다. 역시 그리스, 일본, 중국이 3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3위까지 국가의 총 DWT가 10년 동안 약 35% 증가하는 동안 미국은 거꾸로 감소했으며, 순위도 7위에서 13위로 6단계나 하락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올해 2월 미국의 'SHIPS for America Act(SHIPS Act)' 법안을 발의한 배경이기도 하다. 향후 이를 통해 미국은 자국 상선 확충, 조선산업 지원, 해양인력 양성 및 유지 등 미국 해운 및 조산 산업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아쉽게도 2014년 5위에서 작년 1월 기준 6위로 한 단계 하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2017년 세계 7위 해운선사인 한진해운이 파산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나마 이후 해운시장 재건을 위해 국내 해운기업들의 경쟁력 강화와 선대 확충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더 큰 하락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늦게나마 'SHIPS Act'를 통해 전시 필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외국의 공급망 위기 발생에도 대비하여 해상운송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현재 우리나라는 수출입 물량의 99.8%를 바다를 통해 운송하고 있다.
더이상 긴 말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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