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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리고 나의 이야기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즐기면서 죽는 법

글의 제목('즐기면서 죽는 법')이 다소 자극적이다.

책의 내용 중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몽테뉴처럼 '죽는 법'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생각에 두 문구를 합쳐보니 재미있는 글의 제목이 되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렵지만 짚고 넘어가야하는 '행복'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주변에서 까끔씩 "너는 행복해?"라고 물어볼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애써 외면하거나 딴소리를 하곤 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왠지 꺼림직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면 왠지 내가 불행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그랬던 것 같다.

 

책에서 에릭 와이너는 "행복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하면 행복은 사라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행운’ 또는 ‘기회’를 뜻하는 아이슬란드어 ‘happ’로 haphazard(우연), happenstance(우연한 일)과 어원이 같다(고대 그리스어 어원은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즉, 행복은 '우연', '기회'와 관련되어 있으며, 어쩌다 얻게 되는 운으로서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며 사라지는 감정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불행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무엇인 것이다.

 

참고로 동양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없었던 개념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행 幸'과 '복 福'을 사용해서 '행복(幸福)'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물직적인 풍요'로 일부 변질된다. 국어사전(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생각나는 해석인 것 같다).

 

그렇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오는 기쁨이다.

에릭 와이너가 말했듯이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서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나에게 행복이 찾아온 순간 내가 기쁘다면(사소한 기쁨이더라도)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그러나 '기회'라는 의미와 연결된 것처럼 그 순간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을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이 부분은 블로그의 다른 글 <(김수영: 철학이 내 손을 잡을 때) 오늘을 잡아라: 카르페 디엠 & 카이로스>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면서 행복의 '연속성'은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BC 341-270)에 대한 아래와 같은 책의 내용처럼 어떻게 욕망을 최소화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어느 시점이 지나면 쾌락은 더 증가할 수 없으며 그저 다양해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새로 산 신발 한 켤레와 스마트워치는 더 많은 쾌락이 아닌 더 다양한 쾌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의 소비문화 전체는 다양한 쾌락이 곧 더 많은 쾌락을 의미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잘못된 동일시가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다.

우리는 캐비어를 맛보고 즐거워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우리는 곧 다시 캐비어를 갈망하게 된다. 이게 문제가 된다. 캐비어는 갈망이 우리를 괴롭히는 만큼 맛있을 수 없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난다. 유일한 해결책은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아울러 작가는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1533-1592)에 대해 말하면서 잘 죽기 위해서는 자신을 잘 알기위해 끊임없이 시도해보라고, 그리고 그런 자신을 수용하라고 말하고 있다. 

 

"<몽테뉴처럼 죽는 법>

몽테뉴에게는 자신의 우연한 철학을 담을 문학 형식이 필요했다. 그런 문학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몽테뉴는 직접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에세이다. 프랑스어로 에세이(assay)는 '해보다'라는 뜻이다. 에세이는 실험이자 시도다. 몽테뉴가 쓴 에세이들도 하나의 거대한 시도다. 무엇에 대한 시도냐고? 스스로를 더 잘 알기위한 시도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 잘 죽을 수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 삶을 잘 살아낼 수 없었다.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어쩌면 '즐기면서 죽는 법'은 나 자신을 알기위해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때때로 찾아오는 기쁨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수행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늘도 맑은 가을 어느 날, 편안한 카페에 앉아 평소 다루고(해보다 또는 에세이) 싶었지만 나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참 동안 쓰지 못했던 주제의 글을 마무리 한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물론 탁월한 글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