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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리고 나의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나 자신을 포기할 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너무 싶게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해!", "죽을 만큼 너를 사랑해!" 등의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입에서 뱉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책 <용의자 X의 헌신>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써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과는 영국에서 4년여간 일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2018년에 처음 만났다.
처음 그의 책을 접했던 당시 내가 왜 그의 책과 만날 기회가 없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백야행>, <그대 눈동자에 건배> 등 내가 본 책만 20권이 넘는 것 같다. 지금도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는 그의 책은 가급적 빠지지 않고 보고 있다.
매번 그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지만 그의 책은 인간미가 넘친다. 추리소설이지만 항상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당신은 범인을 처벌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력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1958년 생. 오사카 출신으로 대학에서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덴소>로 사명이 바뀐 <일본전장 주식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취미로 글을 적다가 작가로 등단했다. 어린 시절에는 별로 책을 읽지 않는 아이였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읽은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라는 한 권의 책을 계기로 추리소설에 푹 빠진다. 그는 이과 전공자답게 원자력발전이나 뇌 이식 등, 해박한 과학이론을 구사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출처: 히가시노 게이고 <붉은 손가락>).
그래서 나와 같은 이공계 출신이라 가깝게 느껴졌고, 다른 추리소설과 다르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외심과 함께 같은 이공계 출신으로서 약간의 시기심(상대가 되지 않겠지만)도 나면서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좋아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이 책 <용의자 X의 헌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2019년 봄으로 기억한다. 당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봤다. 이후 그의 다른 책들을 보다가 2021년 이 책만은 소장하고 언젠가 다시 보고싶다는 욕심에 구입했다. 그리고 이번 주말 다시 읽었다.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면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책을 거의 소장하지 않는다. 다시 볼 책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아니면 대부분 중고서점에 판다. 책은 소장에 목적이 있지 않다. 쓸데없이 책꽂이를 차지하고 나의 집중력을 흐리게 하지도 않으며 이사 갈 때도 편하다(나름 20권 이상 소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현재 30권이 넘는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2021년에 이 책을 사길, 그리고 다시 보길 너무 잘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용의자 X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또 쓸데없는 말만 잔뜩한 것 같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소설은 고등학교 수학교사 이시가미 테츠야와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자 그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하나오카 야스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그의 대학교 동기이자 "탐정 갈릴레오"란 별명을 가진 물리학 박사 유카와 마나부의 대결이다.

야스코는 전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갈취에 시달리며 딸 미사토와 힘겨운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우발적으로 전 남편을 살해하게 된다. 이 사건을 우연히 눈치챈 이시가미는 궁지에 빠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완전범죄를 계획하게 된다(앞으로 이 책을 보실 분들을 위해서 결론은 말할 것도 없이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 

 

책에 나오는 아래 내용이 이시가미의 굳은 결심과 그녀를 향한 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이들을 지켜야 한다, 고 이시가미는 다시금 다짐했다. 자신 같은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자신의 지혜와 힘을 총동원해서 이 모녀에게 다가올 재앙을 막아야 한다."

 

또한 주인공 이시가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고 있다.

"구도 구니아키 씨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와 결합한다면 당신과 미사토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에 대해서는 모두 잊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죄책감 같은 걸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나의 행위는 모두 허사가 되고 말 테니까요."

 

흔히 우리는 "Give and Take"라는 말을 쓴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을 경우 우리는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된다. 나도 사람인지라 은근히 기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노력한다. "도움을 준 것만으로 기쁜 것 아닌가?",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좋게 생각해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지 않는가?",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니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자." 등의 생각으로...

 

추리소설은 마지막에 최고의 반전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시작과 함께 살인 사건이 일아나고 이시가미의 완전범죄 계획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추리소설들은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구일지 알려주지 않고 그것을 무기로 우리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단순한 사건 은폐 계획일 줄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마지막 반전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계획을 세우던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자신의 퇴로까지 완전히 차단한 사실에 경악하고 말았다.

 

끝으로 책을 보는 내내 가졌던 "이런 헌신적인 마음을 먹게 된 또다른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1년 전의 일이다. 이시가미는 방에서 로프 한 가닥을 들고 서 있었다. 그것을 걸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미련 같은 건 눈꼽만큼도 없었다. 죽는 데에 이유는 없다. 다만 살아갈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받침대에 올라가 목을 로프에 거는 순간 현관 벨이 울렸다. 운명의 벨이었다. (중략) 문을 열자 두 여자가 서 있었다. 모녀 같았다."

 

스스로를 포기할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답의 일부는 이 책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멋진 추리소설을 나에게 선물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