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은 바다를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산업 특성상 국제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1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유럽과 미국 등으로 확산되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제국주의 시대와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해상교통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해양 사고와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해운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수행하면서 해상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적 기준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1912년 타이타닉(RMS Tatinic)호 침몰사고는 해상안전의 중요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며 국제해사기구(IM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설립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호는 2,2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영국 사우샘프턴(Southapmton)을 출항하여 대서양을 건너 뉴욕(New York)으로 첫 항해를 시작한다. 타이타닉호는 영국 화이트스타라인사(社)가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해 건조한 여객선으로 총톤수 4만 6,328t, 길이 269m, 너비 28.2m, 높이가 20층 건물 정도였으며, 엔진만 4층 건물 크기로 3개 프로펠러를 구동해서 최대 23노트(42.6㎞/h)의 속도로 운항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빠른 초호화 여객선이었다. 또한 혁신적인 기술이 접목된 타이타닉호는 이중바닥(double bottom), 16개의 수밀구획(watertight compartment), 특정 수위가 되면 자동으로 닫히는 문 등으로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unsinkable)'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타이타닉호는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그랜드뱅크스(Grand Banks)로부터 남서쪽으로 640㎞ 떨어진 지점에서 빙산과 충돌한다. 이 빙산은 타이타닉호 선체의 우현(오른쪽)을 긁으면서 배의 5개 구획을 손상시키고, 이로 인해 수밀구획에 물이 차기 시작해서 결국 사고 후 2시간 40분 만에 선체가 두 동강 난 체 북대서양 밑으로 완전히 가라앉고 만다. 타이타닉호 침몰 희생자 수 집계는 다양하지만,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1,500여 명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 해양사고로 생존자는 불과 700여 명이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물론 복잡한 요인에 의해 침몰했지만 신이 아닌 인간의 실수가 사고를 대형화 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통신사들이 유빙경고 메시지를 여러 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배의 앞부분에 있는 돛대에서 배의 항로를 관측하는 선원은 쌍안경도 없이 근무했다. 타이타닉에 불량 리벳(rivet)을 사용해서 침몰 사고로까지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에는 배를 만드는데 일종의 굵은 못인 리벳으로 철판을 연결해서 배를 만들었는데, 불량 리벳을 사용해서 빙산과 충돌 시에 리벳이 부러지면서 물에 침수됐다는 것이다(1920년 경 조선업계에 처음 용접기술이 적용됨).
사고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의하면 타이타닉호가 갖춘 구명정의 수용가능 인원은 모두 1,178명이었지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겨우 7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국제사회는 사고 직후 체계적인 대응이 있었다면 보다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그날 밤 사고 지점에서 32㎞가 채 안 되는 곳에 있었던 ‘캘리포니안호(SS Califonian)’가 타이타닉호의 조난신호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침몰위기의 배를 구조하고 인명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러한 타이타닉호 사고는 해상안전을 규제하는 국제적인 기준과 이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사고 직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Kaiser Wilhelm II)의 요구에 따라 해상에서의 인명 안전에 관한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으며, 그 결과 1914년 최초의 국제협약으로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SOLAS: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을 채택하게 된다. 이 협약은 구명보트 수와 배치, 무선통신 의무화 등 해상안전에 관한 규정을 강화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채택된 SOALS는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5개국만 비준한 상태에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생하여 아쉽게도 발효하지 못한다. 그 후 1929년 런던에서 영국 등 18개국이 참여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으며 기존 SOLAS에 기술적 요건을 강화하고 사회 정세를 반영한 몇 가지 새로운 규정을 신설하고 기존 규칙을 일부 개정하여 1929년에 SOLAS를 채택한다. 이후 1933년에 채택된 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해상에서의 인명 안전을 위한 최초의 통일된 국제협약이 탄생하게 된다.
한편, 국제적인 해사분야 규제를 관장할 독립적인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초기 국제사회의 노력은 각국 정부간 협정이나 지역적인 규제에 그쳤다. 이로 인해 해상안전과 관련된 규제가 통일되지 못하고, 각국의 기준이 상이하여 국제적인 해운 활동에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5년 설립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은 해양관련 문제를 전담할 수 있는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후 1948년 스위스 제네바 UN 해사회의에서 정부간해사자문기구(IMCO: Intergovernmental Maritime Consultative Organization)의 설립을 위한 협약이 채택한다.
이 협약은 국가들의 비준을 받아 1958년에 발효되었으며, 1959년 1월 6일에 공식적으로 UN 산하 전문기구로서 IMCO가 출범하게 된다. 참고로 IMCO는 1982년 지금의 국제해사기구(IM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로 명칭을 변경하기 전까지 사용된 기구 명칭이다.
IMO는 1959년 설립 이후, 해상안전, 해양환경보호, 해상보안, 국제해운의 효율성 증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전 세계적으로 시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현재까지 수행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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