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내내 마음에 담아 두었던 숙제를 마무리했다.
작년(2024년) 초, 무주에 있는 친한 지인의 부모님 댁에 놀러갔다가 부탁받은 숙제였다. 지인은 내가 켈리그라피를 배우고 있는 것을 알고 문에 걸어놓을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켈리그라피 초보자였던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켈리그라피 선생님의 지난 말씀이 떠올라 그냥 써 주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한 번씩 선생님은 "주위에서 써 달라고 부탁하면 무조건 해 주겠다고 하세요. 그래야 실력이 늘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지인은 내가 영국에 있을 때 노르웨이에 계셨던 분으로 정부가 운영하던 유럽 조선해양 전문가그룹을 통해 처음 알게 된 후 10년 넘게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지인은 나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서 현재 대전에 살고 계신다).
부탁을 받은 글은 '입춘첩(立春帖)'인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었다.
'입춘'은 그 해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로 봄이 시작되는 시기를 의미하며, '입춘첩'은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대문이나 기둥에 붙이는 종이를 뜻한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봄이 시작되니(立春) 크게 길하고(大吉),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며(建陽)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길(多慶) 기원한다"는 의미로 입춘첩으로 많이 쓰이는 글귀다.
지난 주에 글을 써서 지인께 드렸는데 많이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나도 기뻤다.
작년 하반기부터 선생님이 써 주신 글을 보며 한 번씩 집에서 연습을 했지만 도무지 글씨가 마음에 안 들었다(비교는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지만, 지나친 비교는 사람을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리 선생님에게 요청하여 지난 주 하루 수업을 오롯이 지인에게 드릴 선물에만 전념했다.
첫 번째 선물은 '입춘첩'이고, 두 번째는 '춘(春), 하(夏), 추(秋), 동(冬)'에 '욕심내지 말고, 하루에 한 걸음씩' 글귀를 넣은 새해 달력, 그리고 끝으로 '천상운집(千祥雲集), 천 가지 좋은 일들이 구름처럼 모여라' 글귀를 넣은 액자였다(참고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선물은 블로그에 올리기에 너무 부끄러워 올리지 않았다).
그냥 선물들을 들고 가려고 하는데 아래 사진과 같이 선생님이 선물을 넣을 종이 가방과 함께 글을 써서 주셨다.
어떤 글을 써 달라고 부탁드릴까 생각하다가 내가 친한 분들께 보내는 메일에 마지막 문구로 자주 사용하는 "늘 감사드리며"를 써 달라고 부탁드렸다. 종이 가방을 보며 첫 번째로 "선물을 빛나게 하는 것은 정성이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로 "역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었다.
광복 80주년이 되는 2025년 을사년(己未年) 새해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이 아래 입춘첩 글과 같길 기원한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 달이 지났다. 글을 쓰면서 갑자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민족 운동가인 이상화(1901~1943년)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생각나서 입춘첩에 "봄이 오는 소리"라는 글을 넣었다. 늘 그랬듯이 "따뜻한 봄은 올 것이다"라는 믿음에...
그나저나 올해는 켈리그리피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지인에게 선물로 드렸지만 많이 부끄러운 글씨다.
미뤄 왔던 숙제를 마쳐서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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