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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쏠쏠한 바다 이야기/조선, 해양, 그리고 해운

(알쏠바잡-24) 어느 선박 계약 미팅의 단상(斷想)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미국 관세 정책에 연일 뉴스가 뜨겁다.
국제관계는 상호 신뢰에서 시작되는 데, 내일은 미국이 무슨 다른 말을 할까 각국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올해 7월 말에 한미 관세협상 타결 소식을 알렸지만, 투자방식이나 구체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아직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비즈니스 세계에서 단련된 사람과 협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를 등에 업고 수시로 협상의 판을 흔들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매우 고단할 것이다.
 
10년도 넘은 이야기지만, 캐나다에서 선주와 신조선(new-building ships) 계약 미팅을 할 때다.
당시 워낙 악명 높은 선주라 각 파트(기본, 기장, 전장, 의장, 배관)의 계약설계 담당자로 지정된 우리는 이미 긴장하고 있었다. 바로 배 설계와 선주 코멘트 처리로 바쁜 나날이 지속되었다.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 선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양의 코멘트를 메일로 보내면서 관련사항을 미팅에서 함께 논의하기를 바란다고 알려왔다.
 
해외출장 당일 새벽 4시, 나는 선주 코멘트에 대한 답변 초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4시간 후에는 집을 나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당장 답변하기 힘들거나 코멘트에 따라 가격변동이 발생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일단 본사에 알아봐 달라고 요청하는 메일을 보내놓고는 출장가는 짐을 쌌다. 연습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도 1시간 정도면 해외출장 가는 짐을 여유롭게 쌀 수 있다.
선주 코멘트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히 예를 들자면 "A라는 국제규정이 있는데, 우리 배에 적용해 줄 수 있겠느냐? 규정을 적용하면 어떻게 바뀌고, 추가되는 금액은 얼마인가?"라던가, "B라는 엔진이 스위스의 C회사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시기상 우리 배에 적용가능한가? 적용하면 연비와 그에 따른 다른 설비는 어떻게 달라지고, 선가(배의 가격)는 얼마나 바뀌는가?" 등이 있다.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드는 생각은 "2008년 금융위기 전이었으면 이런 예의(禮儀) 없는 메일을 받았을까?"였다. 금융위기 직전에는 글로벌 시장이 호황이라 선주가 자기 배를 제발 지어달라고 조선소 앞에 줄을 서던 때였다. 물론 일반적으로 물건을 사는 사람이 '갑(甲)'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고객은 왕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배를 짓고 싶어도 건조할 수 있는 도크(dock)가 2~3년 안에는 없었던 정도로 호황이었던 시기였다. 금융위기 후, 우리는 농담 삼아 "우리가 앞으로 갑이 되는 시절이 올까?"라는 말을 했었다. 아마 금융위기 전이었으면, "미안하지만 다른 조선소에 알아볼래?"라고 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생각은 "이것이 선주의 비즈니스 전략이지 않았을까?"였다. 선주는 이미 우리가 출장가기 한참 전에 코멘트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면 간단한 것부터 시간을 두고 검토해야하는 것까지 코멘트 갯수가 100개가 넘었다. 그것을 출장가기 전날 우리에게 보내서 정신없게 만들고,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실수를 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계약협상에서 상대방(조선소)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공짜로 자기(선주)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다른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3박 4일의 빡빡한 미팅 일정이었다.
밴쿠버에 있는 선주사 사무실에서 각자 소개와 악수를 하고 바로 계약미팅에 돌입했다. 미팅은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저녁 먹은 후 8~9시까지 계속되었다. 미팅이 진행되는 동안 점심과 저녁 식사 모두 선주가 배달시킨 음식을 사무실 옆 공간에서 함께 먹었다. 미팅 후 밤새 본사와 교신하면서 다음 날 미팅을 준비하고, 아침에는 식당에서 다 같이 밥을 먹으며 미팅 전략을 세웠다. 3박 4일 미팅 기간 동안 총 4~5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선주의 지저분한 미팅 방식과 무리한 요구에 미팅을 시작한 지 하루만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틀 째 되는 날 오후, 우리 총괄중역은 드디어 "우리가 구걸하러 여기 온 것이 아니다(We are not begging you!)"라며 폭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미팅할 거면 오늘 5시까지만 하고,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선주는 눈치를 챗는지 저녁을 한식 뷔페로 준비했는데, 먹고 간단히 미팅을 하자고 했다.
우리는 선주와 좀 더 실랑이를 벌였지만, 미팅 분위기가 조금 달라질 거라는 기대에 결국 우리는 뷔페를 먹었다. 밴쿠버에는 우리나라 교민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한국 음식도 잘 하는 집이 많다고 이야기 들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될 미팅을 앞두고 밴쿠버에 도착한 첫 날 저녁에 우리가 먹었던 한국 음식도 맛있었다. 그러나 그 날 나온 한식 뷔페는 최악이었다. 험악한 미팅 분위기라 마음이 불편해서 맛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음식은 느끼했으며 형편없었다. 우리끼리는 "이것도 선주 전략인 것 같다. 일부러 이런 음식을 시켜서 소화 안되게 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바로 옆 의장설계(equipment design) 담당 부장님은 한국어로 미팅을 하면서 연신 힘들어했다.
외국 선사였지만, 선주측 관련 담당자는 한국사람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문제는 언어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녁까지 협의하고 밤새 검토해서 오면, 아침에 다른 말을 하면서 요구사항을 바꾸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당시에 그 선주측 담당자는 한국에서도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외국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힘든지는 알겠지만, 이것은 신뢰의 문제였다. 부장님은 미팅 마지막 날,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라는 말씀을 하였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미팅 마지막 날 새벽 6시, 평소 친하게 지냈던 동료와 밴쿠버 바닷가를 1시간 정도 산책했다. 전날 저녁 그 동료는 밴쿠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며 새벽에 호텔 근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내가 동의했던 것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그리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그 날 선주와 우리는 각자 맡은 미팅 메모의 하단 양측에 싸인을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진 속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미팅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계약 미팅이다.
 
다시 한미 관세 협상으로 돌아가자.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걸하러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도 있어야 한다. 물론 치밀한 계산과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건투를 빈다.
 

어느 계약 미팅의 단상 (출처: 저자가 ChatGPT를 이용하여 생성한 그림)